> 자료실 > 동영상
 
이름 배동인
상세 date : 2013.02.23 , hit : 1,939
제목 어제 저녁의 과천시향 연주회 감상소감 첨부화일  

 

과천시립교향악단의 제 34회 정기연주회가 2013.02.22, 19:30에 과천시민회관 대극장에서 열렸다. 3곡이 연주되었는데 차례로 그들의 소개와 나의 감상소감을 적어본다:

1. 알렉산드르 보로딘(Aleksandr Borodin, 1883-87)의 오페라 '왕자 이고르'(Opera 'Prince Igor') 중에 폴로베츠인의 행진곡(Polovetsian March):

먼저 보로딘에 대해 인터넷 검색창을 통해 알아본다: 보로딘(Alexander Borodin)은 러시아의 귀족(그루지야 호족의 후예)인 게데아노프 공작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생부의 성을 받지 못한 그는 농노(農奴)였던 포리피리 보로딘의 아들로 입적되어 자랐다.
그 때문에 충분한 교육을 받고도 사회활동을 제한 받았으며, 자신이 경험한 사회적 부정의가
그의 민주사상의 원천이 되었다. 어릴 때부터 악재(樂才)를 보였고, 화학에도 열중하여 화학자로서
유기화학연구를 계속하면서 작곡 활동을 병행하였다.
작곡가로서는 그는 신러시아악파(樂派)에 속한다. 연구생활 틈틈이 작곡을 하였으나 러시아의
유수한 실내악 작곡가로, 또 러시아 국민음악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졌다. 작품은 동방적(東方的)인
색채가 농후하며 대표작에 교향곡 2번(1876), 현악4중주곡(1881), 오페라 <이고리공> 등이 있다.
보로딘의 최대 걸작은 가극 <이고리공(公)>이다. 12세기 때 유목민 적에게 포로가 되어서도
러시아의 명예를 끝까지 지킨 이고리공의 무용담을 노래한 것으로 “타타르 아가씨들의 춤”이
포함된 제3막이 유명하다. 평생 과학자와 예술가의 중간에서 작곡에 몰두할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했던 그는 여가 시간에 작곡을 했다고 한다.

이고리 왕자(러시아어: Князь Игорь)은 알렉산드르 보로딘가 작곡하고 서막이 있는
4막의 러시아어 오페라이다. 작곡가는 12세기 러시아 왕자 이고리 스브야토슬라비치와
플로베츠 부족과의 항쟁을 중점으로 그린, 동 슬라브의 서사시, 이고리 왕자의 전투 이야기
(러시아어: Слово о полку Игореве)를 각색하여 대본을 작성하였다.
이 오페라는 1890년 11월 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보로딘은 1887년의 죽음으로 이 오페라를 미완성으로 남겼다. 작곡과 관현악은 그 후,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와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에 완성되었다.
발간된 악보에 다르면,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서막과 1막, 2막, 4막과 3막 시작 부분의 플로베츠인
행진곡에서 작곡이 안 된 부분의 관현악 부분을 보충하였다.

<작품의 배경>

1185년 투르크어를 사용하는 이민족인 폴로베츠족과 싸워 패한 이고리공(公)은
아들 블라디미르와 함께 폴로베츠족의 포로가 된다. 족장(族長)은 이들 포로들을 후대하고
블라디미르는 족장의 딸과 사랑에 빠진다. 결국 사랑하는 여인 곁에 머물러 있으려는
아들을 남겨 둔 채 이고리공은 폴로베츠족에게서 탈출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조국으로 돌아온다.
용기와 인정이 있는 두 나라 장군의 대비, 동양적이며 활기찬 타타르인의 선율, 감미로운 사랑 등이
극적으로 잘 조화된 작품이다.
보로딘은 러시아 국민악파의 한 사람으로서 유럽에도 널리 알려져 인정받았다.
다양한 활동 영역으로 인해 많은 음악 작품을 창작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음악적 수준은 뛰어났다.
러시아의 중세 문학 <이고리 원정기>를 바탕으로 보로딘 자신이 대본을 쓰고 작곡했으나,
미완성인 채로 그가 사망했기 때문에(1887) 후일 림스키-코르사코프와 글라주노프가 이 오페라를
완성하여 1890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극장에서 초연하였다.
술에 취한 스쿨라와 에로슈카는 익살스럽고 비겁한 인물로서 그들의 노래를 통해 방탕하고
익살스러운 중세기의 러시아를 구현하고 있다.

<시놉시스>

서막
이고리공이 통치하는 1185년 푸티빌의 시장 광장. 백성들은 타타르 부족인 폴로베츠인들을
토벌하러 떠나는 이고리와 블라디미르를 환송한다. 이고리는 갈리츠키에게 야로슬라브나를 부탁한다.

제1막
블라디미르 갈리츠키의 집. 이고리공의 부재 동안에 갈리츠키가 푸티빌을 다스리고 있다.
백성들이 대공의 영광을 칭송한다. 사실 갈리츠키는 향락 생활에 빠져 지낸다.
그런데도 고도크 연주가인 스쿨라와 에로슈카는 갈리츠키를 칭송하며,
이고리 대신에 갈리츠키를 통치하는 대공으로 삼자고 백성들을 선동한다.
야로슬라브나는 자기 방에서 이고리공을 생각하며 불안해하는 가운데 지나간 행복을 회상한다.
처녀들이 나타나 갈리츠키가 한 처녀를 납치해 갔다며 그녀의 도움을 요청한다.
야로슬라브나는 갈리츠키와 심하게 다툰다. 갈리츠키가 결국 납치한 처녀를 풀어 주기로 약속한다.
귀족들이 들어와 블라디미르와 이고리가 폴로베츠인들에게 패해 포로로 잡혔고 적들이
푸티빌에 행군해 있다고 전해준다.

제2막
폴로베츠인들의 진영. 두 폴로베츠인 처녀들이 노래하며 춤추고 있다.
초조해진 콘챠코브나가 사랑하는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를 기다리고 있다.
이고레비치도 역시 그녀를 사랑한다. 그들이 서로 만난다. 콘챠코브나는 그녀의 아버지가
그들의 결혼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이고레비치는 자기 아버지는 적의 딸과
결혼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패배로 인하여 치욕감을 느끼는 이고리는
고향과 야로슬라브나 생각에 젖는다. 타르타르인인 오블루르가 그에게 탈출할 계획을 제안한다.
콘챠크가 와서 더 이상 적대시하지 않겠다면 이고리를 친구로 대접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함께 연합하여 세계를 정복하자고 회유한다. 이고리는 거절한다.
그는 오로지 자유만을 갈구했던 것이다. 흥을 돋우기 위해서 콘챠크는 노예들에게 춤과 노래를 시킨다.

제3막
폴로베츠인들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진영으로 돌아오자, 콘챠크가 그들을 환영한다.
푸티빌이 전쟁으로 황폐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고리는 탈출하여 전쟁을 재개하기 위해서
오블루르의 도움을 받아들인다. 그가 블라디미르와 탈출하려고 했는데, 콘챠코브나가 나타난다.
그녀는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지만 이고리는 거절한다. 그러자 그녀가 진영에 경보를 울린다.
이고리는 탈출에 성공했으나 블라디미르는 붙잡힌다. 그러나 콘챠르는 딸과 결혼시키기 위해서
그를 살려주라고 명령한다.

제4막
푸티빌의 성벽. 야로슬라브나는 남편을 생각하며 탄식한다. 그녀는 황폐화된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고리공이 한 폴로베츠인과 함께 다가오는 것을 본다. 그녀는 남편의 품으로 달려든다.
그는 도시를 구하기 위해서 탈출했다고 이야기해 준다. 그들은 함께 성채로 향해 간다.
바로 그 때 그들은 스쿨라와 에로슈카가 노래를 부르며 이고리를 비웃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러다 그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그들은 갑자기 노래를 멈춘다. 그리고 이번에는 종을 울리며
이고리를 찬양한다. 백성들이 이고리공의 귀환을 축하한다.

과천시향이 어제 저녁 연주회의 첫 곡으로 연주한 '폴로베츠인의 행진곡'은 약 5분 정도의 담백한 서곡으로 이해됐다. 처음 듣는 곡이어서 다소 생소했기에 보로딘의 오페라 '왕자 이고르'에 나오는 행진곡이니 이 오페라를 들어보고 싶었다.

이 기회에 보로딘에 관한 정보를 역시 인터넷 검색창을 통해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보로딘` Aleksandr (Porfiryevich) Borodin `

1833. 11. 12(구력 10. 31)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1887. 2. 27(구력 2. 15) 상트페테르부르크.

19세기의 대표적인 러시아 민족음악 작곡가이며 알데히드 연구로 유명한 과학자.

그루지야의 왕자와 여군의관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으나, 일찍이 언어와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학생 때 피아노·플루트·첼로·작곡을 배웠다. 1850~56년 의과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으며, 1858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1859~62년 서유럽 유학을 마친 후 모교의 화학조교수, 1864년에 정교수가 되었으며, 이 시기부터 중요한 작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교향곡 1번 E 장조(1862~67)는 그가 속했던 5인조 작곡가들인 밀리 발라키레프, 니콜라이 림스키 코르사코프, 모데스트 무소르크스키, 세자르 큐이와 친교를 맺으면서 나오게 된 작품이다. 1869년 교향곡 2번 B단조의 작곡을 시작했으며 같은 해에 걸작 오페라 〈이고리 공 Prince Igor〉(미완, 사후 림스키코르사코프와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에 의해 완성됨)도 작곡하기 시작했다. 〈이고리 공〉 2막에는 자주 연주되는 ' 폴로비치안 춤'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현악 4중주 2곡과 다수의 가곡, 미완성 교향곡 3번 A단조, 교향시 〈중앙 아시아의 초원에서 In the Steppes of Central Asia〉도 작곡했다. 보로딘에게 음악활동은 학문 연구에서 오는 긴장을 푸는 여가활동에 지나지 않았으며 1872년 여성을 위한 의학강좌 개설을 돕기도 했다. 1880년대에는 과중한 업무와 나빠진 건강 때문에 작곡할 시간적 여유가 거의 없었으며 무도회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보로딘의 작품은 그를 러시아 작곡가들 가운데 선두에 서게 했다. 그의 음악은 강한 서정성을 지녔으면서 영웅적 주제를 다루는 데도 뛰어났고 그는 흔치 않은 섬세한 리듬 감각을 지녔으며, 관현악 음색과 이국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낭만주의 시대의 걸작들로 평가되고 있는 그의 교향곡과 현악 4중주에서 처음 등장하는 하나의 동기에서부터 전체 악장을 전개하는 공식적인 구조를 발전시켰다. 그의 선율은 러시아 민요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으며, 19세기 다른 러시아 민족음악 작곡가들처럼 서구 음악에 없는 파격적인 화성을 사용했다.

2. 요한 네포무크 훔멜(Johann Nepomuk Hummel, 1778 - 1837)의 트럼펫 협주곡 E장조:

우선 훔멜에 관해 알아본다:


국 적 : 오스트리아
출생지 :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활동년도 : 1778년 11월 14일 (보헤미아 프레스부르크) - 1837년 10월 17일 (독일 튀링겐 바이마르)

요한 네포무크 훔멜은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음악양식이 변화하던 과도기에 활약한 음악가이자 위대한 피아니스트였다.

훔멜은 1778년 11월 8일,보헤미아의 프레스부르크(현재의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요셉 훔멜은 비엔나의 제국군악학교장이었으며 쉬카네더(Schikaneder)극장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도 했다.

쉬카네더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의 초연에서 파파게노 역할을 맡았던 흥행자, 대본가, 성악가 겸 연극인이다.

어린 훔멜이 모차르트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모차르트의 친구인 쉬카네더 때문이었다.

훔멜은 8세 때에 우연히 모차르트를 만났다.

모차르트는 훔멜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집에 데려가서 기숙하며 제자로 가르치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렇게 하여 훔멜은 모차르트의 삶에 있어서 최초로 그의 집에 기숙하는 제자가 되어 피아노와 작곡법 등을 배웠다.

1년후 훔멜은 9세 때에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을 대중 앞에서 연주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훔멜은 2년동안 모차르트의 가족과 함께 생활했다.

훔멜이 모차르트의 집에서 2년을 보내며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성장하자 그의 아버지는 훔멜을 모차르트처럼 유럽의 여러곳을

데리고 다니며 연주회를 하면 돈을 벌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와 훔멜은 영국 런던으로 갔다.

이곳에서 무치오 클레멘티(Mucio Clementi)의 주선으로 연주회도 하고 공부도 하며 4년을 지냈다.

하이든도 마침 훔멜과 같은 시기에 런던을 방문하고 있었는데,하이든은 훔멜을 위해 1791년 <피아노 소나타 A플랫 장조>를 작곡했다.

훔멜은 하이든이 참석한 가운데 이 곡을 하노버 스퀘어 룸에서 초연하였다.

그해 12월에는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났다.

후에 훔멜은 신동 피아니스트로서 아버지와 함께 독일, 네덜란드, 영국 등지를 4년간 여행했다.

1793년 빈으로 돌아와 요한 게오르크 알브레히츠베르거(Johann G.Albrechtsberger), 요제프 하이든,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 당시 젊은 베토벤이 비엔나에 도착하였고, 베토벤도 역시 하이든과 알브레헤츠버거로부터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훔멜과 베토벤은 동문으로서 그리고 친구로서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베토벤의 임종이 가까웠을 때 훔멜은 부인 엘리자베트와 제자 페르디난트 힐러를 데리고 몇번이나 베토벤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훔멜은 슈베르트와도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 이유로 슈베르트는 그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3편을 훔멜에게 헌정하였으나 이들 소나타가 출판될 즈음에 훔멜과 슈베르트가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출판사는 이 곡들을 훔멜이 아닌 로베르트 슈만에게 헌정하는 것으로 변경하여 출판했다.

작곡가가 자기의 곡을 헌정할 때에는 관례적으로 살아 있는 인물에게 헌정했기 때문이었다.

1804년 훔멜은 아이젠슈타트의 에스터하지 궁전에서 음악감독으로 봉사하던 하이든의 자리를 이어 받았다.

훔멜은 7년동안 에스터하지 궁전의 음악감독으로 재직했다.

이후 에스터하지 음악감독을 사직하고 러시아와 동유럽을 순회 연주하였다.

이때 오페라 성악가인 엘리자베트 뢰켈(Elisabeth Roeckel)을 만나 결혼하였다.

피아니스트와 선생으로서 더욱 성공하게 된 후 1819년 그는 바이마르에서 음악감독이 되었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중요한 것들은 3중주곡, 소나타, 론도, 6곡의 협주곡 등으로 이루어진 피아노 작품들인데 모두 우아한 양식에 거장다운 면모가 엿보이는 선율, 주제의 장식 선율을 지니고 있다.

유려하고 말끔한 짜임새를 이루어 당시 경쾌한 빈풍의 피아노 연주에 적합했지만 그의 작품들에는 당대 그의 가장 큰 적수였던 베토벤의 작품들 속에 표현되어 있는 정서적 깊이와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훔멜은 생전에 많은 존경을 받았고 세상을 떠날 때에도 애도의 물결이 끊이지 않았으나 사람들은 쉽게 그를 망각하였다.

훔멜의 작품이 오늘날 제대로 연주되지 않는 것도 생각보다 빨리 진행된 망각 때문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새로운 낭만주의의 시대가 파도처럼 밀려 왔기 때문이었다.

이제 훔멜의 고전적 아이디어는 빛바랜 것이 되었다.

훗날 20세기 초에 고전의 리바이벌이 있을 때에도 오히려 하이든은 빛을 보았지만 훔멜은 잊혀져 있었다.

왜 그랬을까?

모차르트라는 거목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1828년, 훔멜은 독일에 있을 당시 "A Complete Theoretical and Practical Course of Instruction on the Art of Playing the Piano-Forte"(1828: 피아노연주의 이론과 실기 완전 정복)이라는 저서를 출판했다.

이 책은 새로운 운지법과 장식음 연주법에 대하여도 자세히 지시해 놓았기 때문에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후에 훔멜의 피아노 연주 기법은 카를 체르니(Carl Czerny)를 통하여 전수되었고 체르니의 기법은 리스트를 통하여 전파되었다.


훔멜의 영향력은 쇼팽이나 슈만의 초기작품에서도 볼수 있다.

특히 쇼팽의 협주곡에서는 훔멜의 <피아노협주곡 B 단조>와 <피아노협주곡 A 단조>를 상당히 반영하였음을 느낄수 있다.

쇼팽은 훔멜이 폴란드와 러시아 연주여행을 다닐 때에 그의 음악을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슈만도 훔멜의 작품을 연주하기를 즐겨했다.

특히 <소나타 F 샵 단조>와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은 슈만의 레퍼토리에 자주 포함되는 것이었다.

나중에 슈만은 훔멜에게 배우겠다고 요청하였으나 훔멜은 슈만이 정신적으로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고 거절했다.

리스트도 처음 얼마 동안은 훔멜에게서 배웠다.

훔멜의 제자 중에는 칼 체르니, 프레데릭 질르허(Frederick Silcher), 페르디난트 힐러(Ferdinand Hiller), 지기스몬트 탈베르크((Sigismond Thalberg), 펠릭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아돌프 폰 헨젤트(Adolf von Henselt) 등이 있다.

훔멜은 8편의 피아노협주곡, 10편의 피아노 소나타, 3편의 피아노 3중주곡, 1편의 피아노 4중주곡, 목관악기 8중주곡, 2편의 피아노 6중주곡, 만돌린 협주곡, 트럼펫 협주곡, 4손을 위한 피아노곡, 22편의 오페라 및 징슈필, 미사곡 등을 작곡했다.
- 출처: 정준극의 블로그 -

어제 저녁의 과천시향은 여전히 김경희 지휘자 아래 명확하고 열정적인 연주를 들려주었는데 트럼페티스트 안희찬 교수(추계예술대)의 협연이 돋보였다. 안희찬 교수님은 '한국의 대표적인 트럼펫 연주자'로 알려져 있다: 영남대와 네데르란드 로테르담 음악원에서 최고연주자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했고 KBS교향악단을 비롯하여 여러 교향악단의 수석을 역임했다. 그만큼 그의 연주경력은 화려하다(여기 어제 저녁 과천시향 연주회 프로그램 예고를 참고해주기 바란다).

훔멜의 트럼펫 협주곡을 연주실황으로 들어본 것은 나에게 특별한 체험이었다: 처음 느껴본 충만감과 황홀감이었다. 과천시향의 음색과 연주스타일은 이미 정평이 나있는데다 안희찬 교수의 트럼펫 연주는 금상첨화격으로 교향악의 극치를 보여주고 들려주었다고 생각된다. 훔멜의 곡 자체가 고전적이면서 낭만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어 우아하면서 베에토펜에 미치지는 못해도 그나름의 장엄한 느낌을 전해주어 모차르트의 다른 변형을 보는 듯했다.

3. 15분의 휴식시간 뒤에 마지막으로 무소르그스키(Modest Petrovich Mussorgsky, 1839.03.21 - 1881.03.28)의 '전람회의 그림'(Pictures at an Exhibition):

먼저 강수정(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원) 님의 해설이 흥미로웠다: 이 곡은 1874년에 작곡됐는데 젊은 나이에 심장병으로 급사한 국민주의 화가이며 건축가였던 친구 빅토르 알렉산드로비치 하르트만(Victor Alexandrovich Hartmann, 1834-73)의 회고전을 보고 그 인상을 바탕으로 작곡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강수정 님은 하르트만의 그림들을 하나씩 보여주며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그래서 이 곡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빅터 하르트만의 그림들을 다음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http://blog.naver.com/jigubook/29708396

이 곡은 '프롬나드'(Promenade. 산책)로 시작되는데 모두 10개의 표제를 가진 곡들로써 구성돼있다. 전주나 간주의 역할을 하는 5개의 프롬나드는 같은 주제를 바탕으로 1, 2, 3, 5, 7곡 앞에 여러 형태로 변형되어 각각의 곡들을 통일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곡은 표제음악의 본보기라고 볼 수 있다: 10개의 그림을 하나씩 음악으로 그려내는데 저마다 특유의 이미지와 선율을 지니고 있어 깊은 사색의 세계로 이끌어준다. 무소르그스키의 창의력을 새삼 절감하게 되었다. 매우 감동적인, 오래 기억에 남을 음악이었다.

이번에도 과천시향은 지금껏 갈고 닦아온 탄탄한 실력을 여지 없이 들려주고 보여주었다. 거기엔 지휘자 김경희 교수님의 뜨거운 열정과 냉철한 지성이 추진력이 되고 있음이 돋보였다. 앞으로도 줄기차게 건승해 나아가기를 기원한다.

 

2013.02.23, 새벽 배동인

 

이전글 :   어제 저녁의 과천시립교향악단의 제40회 기획연주회&..
다음글 :   과천시립교향악단의 제 34회 정기연주회 감상소감(축약)
목록보기